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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3월 27일
![]() 데이빗 슬레이드의 "하드 캔디"는 꽤 아슬아슬하게 시작합니다. 10대 소녀 헤일리(엘렌 페이지)가 온라인 채팅으로 알게 된 30대 남자 제프(페트릭 윌슨)를 만나는 것만 해도 위험천만이거늘, 냉큼 그의 집까지 따라가거든요. 혼자 사는 남자가 어린 소녀를 데려와 칵테일을 만들어주는 걸 보면 속셈이 뭔지 빤히 들여다 보이는데, 거리낌 없이 누가 빨리 마시나 내기에 돌입하는 걸 보면 요 꼬맹이도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고.. 그래도 걱정되는 쪽은 헤일리일 수밖에 없죠. 세상에 어떤 늑대가 자신의 먹잇감을 앞에 두고 곤드레 만드레 맛이 가겠어요? 하지만 "하드 캔디"의 다음 장면은 예상을 뒤집습니다. 정신을 잃은 쪽은 헤일리가 아닌 제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포박된 상태고, 뒤늦게 그녀가 몰래 약을 먹였음을 깨닫죠. 다짜고짜 아저씨를 아동성폭행범으로 몰아붙이는 소녀는 증거를 찾아 집안을 들쑤시고, 그가 아무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제프의 빤스를 홀랑 벗긴 헤일리의 선택은 거세. 왼쪽 불X을 먼저 잘라줄까? 오른쪽을 먼저 잘라줄까? 다 큰 남자가 울음을 터뜨리며 사정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마냥 전복적 쾌감을 즐기기도 미안해져요. 포스터만 봐도 눈치 챌 수 있듯 "하드 캔디"는 빨간망토 소녀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영화는 아담하고 꾸밈도 별로 없어요. 둘이 카페에서 만나는 첫 장면을 제외하면 제프의 집안에서 벗어나질 않거든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이지만 기계적인 서스펜스를 남발하지도 않고, 팽팽한 힘겨루기를 날카롭게 묘사했다기에는 또 너무 일방적인 관계고, 그래요. 간혹 제프가 반격을 가하는 순간이 있긴 하지만 헤일리는 그리 어렵지않게 게임의 주도권을 장악합니다. 빨간 망토 버젼 "복수는 나의 것"라고 할까? 영화는 새디스틱한 취향을 천연덕스럽게 밀어붙이는 것으로 남자들의 악몽을 한껏 자극합니다. 그러다 결말에 가서는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줄도 알고.. "하드 캔디"는 재주도 있고, 시간도 좀 있는 시나리오 작가가 평소 잘 아는 감독을 꼬드겨 후다닥 헤치우기 딱 좋은 영화고, 그 만큼의 기대치에 부응합니다. 이것저것 신경 쓴 흔적들도 눈에 보이는데 영화의 규모가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눈여겨 볼만 해요. 엘렌 페이지의 존재감도 눈에 잘 들어옵니다. 너는 누구냐고 묻는 제프에게 나는 모든 소녀이자 여자이자, 어쩌고 저쩌고 대답하는 그녀의 정체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저 어린아이 같은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몸뚱아리를 가진 여자아이가 성인 남자를 혼쭐내는 광경만으로도 다소 뻔한 교훈극에 나름 구경할 만한 재미가 더해지는 거죠. 역시나 과격한 빨간망토 소녀 영화라는 점에서 매튜 브라이트의 "프리웨이"를 연상시키지만, 리즈 위더스푼은 그래도 성질부릴 때는 무서워 보이잖아요? 반면 여기에는 엘렌 페이지의 천진한 마스크와 난폭한 기질의 대비가 불러오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잔인한 폭력묘사로 보는 이를 괴롭히는 대신, 주어진 상황 안에서 배우 홀로 극을 이끌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화이기에 그 효과는 더 잘 살아나죠. 다른 배우라고 못할 역할은 아니겠습니다만, 페이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귀여운 팜므파탈을 만날 수 있는 즐거움도 없었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