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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5월 08일
![]() 일정한 수준 이상을 유지하는 준수한 작품들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늘려온 시네아스트의 최고 걸작을 뽑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30여 년간 해마다 한 편 꼴로 자신의 작품을 발표해온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죠. 사실 이 정도면 영화 한 편을 뚝 떼어다 놓고 좋다 나쁘다를 논한다는 것도 부질 없어 보여요. 그냥 하루 날 잡아서 연대순으로 영화를 쭉 보는 것만으로도 한 인간이 어떻게 나이를 먹고, 성장해왔는지를 구경하는 기분이 들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우디 앨런처럼 자기 자신을 페르소나로 삼는 사람이라면 더 말 할 것도 없죠. 하지만 예술가도 인간이니 당연히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이클이 있을 테고, 또 어떤 정점에 이르는 순간 역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명성을 획득한 시기를 예술가의 전성기로 가정하자면 우디 앨런의 정점으로 "애니 홀"이나 "맨하탄"을 꼽는 게 가장 무난할 듯싶지만 개인적으로는 "한나와 그 자매들"(1986)을 시작으로 90년대 초까지 이어지는 그의 작품들을 좋아해요. 앨런의 나이가 대충 쉰에서 예순으로 향하는 시기에 나온 작품들답게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보다 깊이가 있고, 세상을 향해 품고 있는 의문은 젊은날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라도 이에 대한 대답은 훨씬 무르익은 기분이거든요. 물론 이 시기의 앨런 영화들에서 베르히만 냄새가 지대 풍긴다는 점 역시 뭔가 그럴 듯해 보이는 이유가 될 수 있을 테고요. "한나와 그 자매들"은 딱히 주인공 없이, 다수의 캐릭터들이 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하는 영화입니다. 제목대로 세 자매의 이야기를 다루고는 있지만 정작 흥미로운 이들은 세 자매를 꼭지점 삼아 그 사이를 들락날락거리는 남자들이에요. 시작부터 아예 처제를 보며 "아, 그녀는 너무 아름다워."라고 입맛을 다시는 남자의 넋두리가 등장하고 질병에 대한 병적인 호들갑이 빠지지 않는 등, 여기엔 우리에게 익숙한 앨런식 남자들의 고뇌가 깃들어 있습니다. 자신을 받아주기만 한다면 무조건 아내와 헤어지겠노라고 설레발을 치던 엘리엇(마이클 케인)은 정작 그토록 갈망하던 처제를 품에 안고나자 집을 박차고 나올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신의 뇌에 종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피를 말리던 남자 미키(우디 앨런)는 자신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환호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언젠가 인간은 죽기 마련이라는 사실에 금세 삶의 의욕을 상실해버리죠. 욕망의 덧없음이나 삶의 유한함, 이 모든 건 우리가 살면서 일찌감치 깨닫게 되는 진리들이지만 어쩌겠어요? 저질러봐야 후회할 게 뻔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못 해봐서 안달하는 게 인간이고, 또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살아가는 것 또한 인간이거늘. 그녀가 아름답다는 깨우침은 늘 그녀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순간 더 이상 그녀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반갑지 않을 거라는 깨우침보다 먼저 찾아오고, 아무리 잘났다고 찢고 까불어봤자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갈 뿐.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절대적인 지식은, 인생은 무의미 하다는 것이다."라는 톨스토이의 경구와 완벽하게 조응하는 앨런 특유의 냉소적인 세계관은 육체라는 껍데기 안에 감춰진 나약하고 비열한 본성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규정합니다. 저로선 이 명제를 부정하고픈 욕구가 없어요. 실수를 반복할 만큼 우매하지 않다면 그건 인간으로서의 매력이 없다는 뜻이고, 이 세상의 모든 드라마는 아무런 재미도 없을 테니. 덤덤한 일상성을 스케치하며 표리부동한 삶의 단면들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절묘하게 조율된 캐릭터들의 조화로 뼈아픈 공감을 이루어내는 솜씨가 베스트로 발휘된다는 점에서 "한나와 그 자매들"은 우디 앨런의 필모에서도 상석을 차지할 만한 자격이 있어요. 세상에는 집값이 얼마나 오르느냐 내리느냐 따위 보다 훨씬 흥미로운 문제들로 가득하고, 앨런의 모든 영화들이 그러하듯 여기서도 질문들은 유머와 비수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뭐, 20여년 뒤에도 "인생? 그게 네 맘대로 될 것 같으냐?"라고 얘기하는 "매치 포인트"와 비교해보면 영감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그나 저나 이런 불륜극을 어린이날 행사 품목으로 풀다니.. 제 정신인가, 폭스? |